'로마인 이야기'이야기 - 6. 공화정의 관직

        로마의 관직체계가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하는 학설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행정적 필요에 근거한 학설이며, 두 번째는 계급 투쟁에 근거한 학설입니다.모든 관직에 대해 두 개의 학설이 대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수 관직의 형성배경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로마인이야기>의 지적대로 하나의 글에 로마의 관직체계를 완성된 형태로 적는 것은 착오를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로마의 관직체계가 한 순간에 뚝딱 완성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최대한 각 관직의 배경을 설명하도록 노력하겠지만, 이 글을 읽을 때에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설명 순서는 각 관직이 창설되었다고 추정되는 시대를 따릅니다. 관직의 한글 명칭은 <로마인이야기>를 기준으로 하되, 가급적 원음을 한글로 표기하였습니다.
1. 집정관(Consul)
        왕정시대 로마의 정치체제는 왕, 원로원, 민회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왕을 타도한 다음에는 왕의 정치적 역할을 대신할 관직이 필요했는데, 그 관직이 콘술입니다. 초보적인 형태의 콘술은 아마도 왕의 모든 권한을 - 군 통수권, 민회 소집권, 재판권 등 - 지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콘술의 임기는 1년 이였고 연령제한은 40세, 정원은 2명이였습니다. 각 콘술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거부권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콘술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그 정책은 시행될 수 없었습니다.
        이 콘술직은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이 콘술직을 독차지하자, 평민들이 콘술직을 하나라도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 것입니다. 그 결과 '콘술 중 한 명은 반드시 평민출신이어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평민이 실제로 콘술직을 차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2. 회계감사관(quaestor)
        이 관직은 왕정시대 때에도 존재했다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기원에 대해서 명확한 서술을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 관직은 군대의 재정을 감독하는 동시에 군단의 병참을 맡았습니다. 연령 제한은 30세 이상이었고, 정원은 두 명이였으나 차차 증가되었습니다. <로마인이야기>에서는 40명까지 증원되었다고 주장합니다.
3. 칸슐러 트리뷴(Consular Tribunes)
        로마 공화정의 관직 중 가장 모호합니다. 5세기 중반즈음 나타나서 3세기 중반즈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관직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군사적 필요에 의한 학설입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로마가 여러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칸슐러 트리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포르센나의 침입 이후와 게르만인의 침입 이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있습니다. 두 번째 학설은 신분투쟁에 관한 학설입니다. 평민들이 콘술직을 요구하자, 귀족들이 콘술직을 개방하는 대신 군통수권을 지닌 칸슐러 트리분직을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이 학설은 칸슐러 트리뷴이 평민에게 개방된 고위 관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칸슐러 트리뷴직의 권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칸슐러 트리뷴이 콘술을 대신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했고, 어떤 때에는 단지 군통수권만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 핵심목적이 군사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로마가 라티움지방을 재통일하고 로마 연합을 결성한 후에 이 관직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4. 재무관(Censor)
        칸슐러 트리뷴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관직입니다. 켄소르의 임기는 1년 반, 정원은 두 명입니다. 지나치게 잦은 전쟁으로 인해 콘술들이 인구조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인구조사를 전담할 관직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사람들은 '켄소르'라는 관직을 만들어 5년에 한 번씩 로마의 인구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이 조사는 병역부담과 세금징수의 원천자료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주요 공공사업의 재정운영을 감독하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이들은 콘술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는 품행이 좋지 못한 원로원 의원을 제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게 됩니다.
5. 호민관(tribune)
        굉장히 유명한 관직입니다. 말 그대로 백성을 좋아하는, 평민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관직입니다. 정치적으로도 매우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콘술이나 가지고 있었던 거부권이 있었고, 평민만 따로 모이는 평민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으며, 평민회의에 법안을 제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로마인이야기>는 호민관의 거부권이 전시에는 사용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로마사>에서는 호민관의 거부권이 로마시 내부와 성벽에서 1로마마일 이내의 지역에서만 효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임기는 1년, 정원은 2명이였고, 로마의 발전에 따라 그 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정원이 10명까지나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 관직은 평민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귀족들의 횡포가 이어지자 평민들은 전쟁을 앞두고 병역을 거부해버립니다. 그들은 로마 근처의 '성스러운 산'에 틀어박혀 농성했습니다.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평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호민관'이라는 관직을 창설했습니다.
        사실 호민관의 권한은 지나치게 강력합니다. 그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임기가 끝난 호민관에게 원로원 의석을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보장했습니다. 평민으로 원로원 의원이 된다는 것은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을 의미했기에, 지나치게 급진적인 호민관은 한동안 나오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6. 안찰관(aedile)
        <로마사>에서는 '호민관의 조수 역할'이라고 하며, <로마인이야기>에서는 '도시관리 및 경찰업무'라고 합니다. 이들의 출신에 대해서도 각기 학설이 다릅니다. 허승일씨의 <로마 공화정 연구>에서는 '처음에는 귀족들만, 나중에는 귀족과 평민이 매년 교대로 선출되었다.'라고 합니다. 반면 <로마인이야기>에서는 '귀족 두 명, 평민 두 명'이라고 하고, <로마사>에서는 '평민들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경찰업무와 도시의 각종 공공기물 관리, 곡물 배급, 경기행사 연출 등을 수행했습니다. 평민들의 기금과 문서보관소의 관리였다는 주장도 있기는 합니다. 간단하게 도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잡무를 처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기는 1년입니다. 아이딜리스의 자세한 숫자나 자격연령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로마시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7. 법무관(Praetor)
        왕을 타도한 직후 로마의 정치체제는 초보적인 콘술-프라이트르의 형태라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공화정 초기의 프라이토르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명확한 형태의 프라이토르는 칸슐러 트리뷴직을 폐지한 다음에 나타났습니다. 프라이토르 역시 콘술의 업무를 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콘술에게서 사법권을 넘겨받았고, 유사시에는 군 통수권(임페리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니 콘술'쯤 되는 듯한 이 관직의 숫자는 행정상의 필요에 따라 계속 증가했습니다.
        프라이토르의 창설 배경에 대해서는 또다른 학설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날 칸슐러 트리뷴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나온 듯합니다. 그러나 칸슐러 트리뷴은 유일하게 평민에게 개방되어 있던 고위관직이었기에 평민들은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원로원은 이에 대한 타협안으로 콘술직을 평민에게 개방하는 대신, 프라이토르라는 관직을 새로이 만드는 방안을 (또는, 원래 존재하던 프라이토르의 권한을 강화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번외 - 원로원(Senate)
        엄밀히 말해 원로원은 로마의 행정기구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원로원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고, 왕에게 정치적 조언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원로원은 국가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국가 최고기구였습니다. 원로원이 이토록 강력해질 수 있었던 이유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원로원은 대부분의 국가 요직을 공급했습니다. 콘술부터 아이딜리스까지 대부분의 관직은 원로원 의원이었거나 원로원 의석이 예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원로원 회의는 사실상의 입법, 사법, 행정계통의 전체 회의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관직들은 대개 그 기간이 1년이었지만 원로원은 항구적인 기구라는 데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1년만 지나면 자신의 관직을 잃고 원로원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원로원의 중의를 거스리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세 번째 원인은 전쟁상황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전쟁은 원칙적으로는 콘술이 담당하지만, 원로원은 콘술에게 전쟁에 대한 조언을 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원로원의 권한이 콘술의 권한보다 큰 상황에서 원로원의 조언은 사실상 콘술의 명령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모호한 체계는 전쟁시에 상당히 불편하였고, 급박한 전쟁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원로원 결의에 따라 모든 전쟁이 진행되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저는 - <로마사>의 지적대로 - 로마의 공화정이 사실상의 귀족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귀족정이 대개 그렇듯이, 이는 지배계급의 고착화를 낳게 되었습니다. 민중에 의한 혁명이 필요했고 실제로도 몇 번의 개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로 인한 사회적 모순은 내전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PS : 다시 읽어보니 상당히 지루하군요.; 그래도 필요한거라서리... :)

by 긁적 | 2007/10/10 20:52 | '로마인 이야기'이야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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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osmosRain at 2007/10/11 10:20
요즘 OCN에서 ROME을 보고있는데 이글을 읽고 보니까 더 재미있고 유익하네요^^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Commented by 긁적 at 2007/10/11 23:28
CosmosRain // 더헛. 감사합니다. ^^ 앞으로 더욱 재미있는 글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Commented by Quency at 2007/10/12 20:52
호민관에게 원로원 자리를 약속했다는거. 이거 예술입니다. 그런데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매년 10명씩의 원로원이 늘어나야 하는건데 원로원 정원은 거의 일정한 수를 유지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매년 원로원의원이 10명씩 죽어나간것도 아닐텐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로마인이야기에 쓰여있었던가.. 기억이 가물.
Commented by 긁적 at 2007/10/13 18:05
Quency // 그러니까요 -_-;; 안 그래도 로마인이야기 1권을 최종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료를 확인할 길이 없어 정말 호민관이 몇 명이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쩝.; 어쩌면 호민관 + 호민관 조수.... 를 합친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단지 <로마인이야기>에 그렇게 써져 있었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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