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이야기 - 번외편1. 1권의 인물들

        로마의 통합과 관련되는 주제를 주로 쓰다 보니 걸출한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 부족합니다. <로마인이야기>1권에 나오는 인물들 중 재미있을 만한 두 사람을 추려보았습니다.

1. 누마 폼필리우스
        누마는 재위기간중에 전쟁을 거의 하지 않은(혹은 전혀 하지 않은) 유일한 왕입니다. 또한 다른 왕들이 원로원과 민회의 합의로 선출된 것과 다르게, 누마는 로마 전체가 라틴계와 사바니계로 분열된 상태에서 마지못해 선출되었습니다. 덕망이 높다는 점을 빼고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고, 통치경험도 없고, 생각도 못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마는 어떻게 전쟁도 하지 않고 지지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로마를 통치했을까요. <로마인이야기>와 <로마제국사>에 따르면, 누마는 '요정이 자신에게 지혜를 준다.'는 말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정이 이야기해준 여러 가지 제도들을 시행했다고 하는군요. 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누마의 정책에 따라 손해를 보고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을 터인데, 그들이 과연'요정이 이야기한거야! 버럭!'이라는 말에 순순히 굴복할까요? 어쩌면 누마의 명성이 요정을 사칭할 정도로 높았을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가진 것 없던 누마가 로마를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고 싶습니다. 누마의 개혁 중에는 큰 돈이 들어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로마에는 누마의 개혁으로 인해 크게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본 집단이 없었습니다. 누마의 개혁 중 시오노나나미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종교에 대한 개혁이며,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조합의 설립입니다. 모두 사람들의 정신을 관장하는 것이며, 제도의 시행에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은 엄밀한 의미에서 '개혁'이라기 보다는, 로마에 퍼져있던 현재 상태의 종교를 배열하고 정리하여 명확하게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누마가 왕의 권한으로 시행한 정책들은 특정 집단의 이익과 손해에 - 구체적으로는 돈이나 토지 -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마가 정치세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 모든 개혁을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헌데 누마의 이러한 개혁이 로마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다는 것이 재미있니다. 누마가 행한 종교개혁은 최소한 오현제 시대까지 로마 사람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조합제도는 라틴인과 사바니인을 하나로 융합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최소한 누마의 다음 왕을 뽑을 때에는 그의 출신 부족을 거론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종교'와 '조합'은 모두 '통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통합이라는 생각 덕분에 로마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 '로마인'으로 만들 수 있었지요. 그 결과가 로마의 세계지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꼭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요.
        이처럼 누마는 큰돈도 안 들이고 시끄럽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로마의 천년지대계를 제시했습니다. 이런 누마를 보고 있노라면 운하건설이나 연금제도, 기타 문제들로 치고 받고 싸우는 꼬라지가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2.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제가 아는 한 로마사에는 세 명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있습니다.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패쓰.) 한 명은 - 12표법을 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 10인 위원회의 위원장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고, 다른 한 명은 대략 삼니움 전쟁 전이나 전쟁 사이에 재무관을 지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입니다. 마지막 사람은 1차 포에니 전쟁 첫해에 로마군을 지휘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싸가지 없게 까불대는 귀족 나부랭이였고, 마지막 사람은 그다지 특기할만한 업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재무관 아피우스에 대해 다룹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사람이 제일 유명하며, '재무관 아피우스' 혹은 '장님 아피우스'로 따로 부릅니다.
        재무관 아피우스에 대한 사료는 단지 두 가지 뿐입니다. 첫 번째는 그가 재무관으로 재직할 때 '아피아가도'와 '아피아 수도'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최초의 본격적인 정략도로와 본격적인 수도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에피소드로서 피로스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던 원로원에 그가 방문한 사건입니다.
        '로마가도'는 분산된 로마 세력의 긴밀한 연락과 유사시의 신속한 대응을 위하 만들어졌습니다. 도로는 그렇다 쳐도, 왜 로마 사람들은 '로마수도'를 만들었을까요? 시오노 나나미는 '물의 인공적인 공급'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사실 그게 아니면 수도를 건설한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당시의 로마에는 물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려 물이 남아돌아 문제였지요. 남는 물을 빼내기 위해 하수도를 먼저 건설했으니까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물을 더 많이 사용하기 위해 수도를 만든 것이 아닐까요? 자연적인 우물과 개천이 있더라도 물을 많이 쓰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집이 우물이나 개천에서 멀면, 거기까지 물을 길으러 가기가 힘드니까요. 그러나 수도를 건설해서 '공동우물'을 여기저기에 설치한다면 사람들은 보다 많은 양의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었겠지요. 뭐.. 사실을 확인하려면 원로원 속기록을 보아야 하고 아마도 그 속기록은 없을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인공적인 물 공급', '물의 풍족한 사용'이 두 가지를 위해 원로원이 엄청난 인력과 재정을 투입하기로 결의한 점이 독특합니다.
        저는 로마를 제외한 다른 민족들이 대형 수도관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 신기합니다. 더욱이, 그러한 발상이 극소수 천재들의 혜안이 아니라 원로원의 공통된 의결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더욱 궁금합니다. 단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권위에 눌린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원로원의원 개개인의 지성이 그만큼 뛰어났던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단순히 우연일까요? 궁금하긴 하지만 해답은 모르겠습니다. 원로원 속기록에 뭐가 써져 있을지 궁금해지는군요. 쩝.;
        피로스의 침임에 관한 에피소드는 꽤나 유쾌합니다. 피로스한테 두 개 군단이 발려서 돌아오자 로마 원로원은 제대로 쫄았습니다. 그래서 원로원은 피로스와 강화를 맺기로 결의합니다. 이 때에 늙은데다 눈까지 멀어버린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원로원에 들어와 소리를 빽 지릅니다. '야이 찌질이새퀴들아. 존나게 발려놓고 강화라는 말이 기어나오냐? 응? 우리 로마에는 지고 맺는 강화같은거 없다!' 물론 그는 품위 있게 이야기했겠지만, 원로원 의원들에게 호통을 친 것은 확실합니다. 결국 로마는 피로스와 계속해서 전쟁을 하고, 마침내 피로스를 몰아냅니다.
        '지고 맺는 강화. 그런거 로마에 없다.' 이 장인적인 고집은 카르타고와의 전쟁 때에도 나타납니다. 1차 포에니전쟁과 2차 포에니전쟁 때 로마는 카르타고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승리를 얻어냅니다. 결국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한마디가 전쟁에 대한 로마의 정책을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은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는 것 말이지요.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정략도로와 대형 수도를 생각해 내고, 모두들 '예'할 때 '아니오'라고 말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역시 시오노 나나미가 '머리속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할 만한 사람입니다.

by 긁적 | 2007/10/17 23:32 | '로마인 이야기'이야기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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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세이람 at 2007/10/17 23:53
아피우스 가도는 읽는 내내 중요한 대목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더군요.
지금도 7번 국도로 살아있는 길이라 하니 2천년을 내다 본 혜안을 가진건 그 일까요?
아니면 그 것을 대대적으로 밀어 붙인 기반을 제공해준 '로마' 그 자체일까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정준엽 at 2007/10/18 02:39
멋지다......


그런데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Commented by 긁적 at 2007/10/18 17:52
세이람 // 방문 감사합니다. ^^. 저도 그게 참 궁금해요. 둘 다 같기도 한데, 한국이 전자라면 뭔가 희망이 있지만 후자라면 절망적이군요 -_-;;;;

준엽 // -_-a 무.. 무슨 이야기이신지.; (덜덜덜덜)
여자친구. 그런거 필요 읍다.
(참말로. 참말이지? 참말이야. 참말이어야만해. 참말인것이 틀림없어. 응. 참말 맞아.........)
Commented by 정준엽 at 2007/10/19 03:22
" 참말이어야만 해"
철학 개론 시간에 배웠는데 이런 것을 칸트식으로 "요청적 여자친구"라고 한다는군요 ㅡ,.ㅡ
Commented by 정준엽 at 2007/10/19 03:25
추가로.
참말 맞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식 여자친구론.
참말이 아니다.는 니체의 여자친구론.
여자친구는 물이다. -탈레스-
여자친구는 무한하다. -아낙시메네스-
여자친구는 공기와 같다. -아낙시만드로스-
여자친구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추가로 여자친구는 그 한도를 지킨다.
여자친구는 분명 존재한다. 영원한 진리다. -피타고라스의 삼각관계 정리-
엘레아 학파의 피타고라스 비판에 따르면, 만약 피타고라스가 옳다면 여자친구는 깨질수도 없고, 생길 수도 없는 그런 것이 된다는군요.
Commented by 정준엽 at 2007/10/19 03:27
어쨌거나 블로그 쥔장은 이데아적 girl friend를 생각하고 계신듯.
철인 28호를 원하시나.
Commented by 긁적 at 2007/10/20 20:59
준엽 // 그.. 그렇지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하기 때문이다.'라는 (조금은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신 분이시니까요. (뭐. 그분의 생각대로라면 완전히 멍멍이소리는 아니긴 합니다만.; 쩝.;)
그리고. 니체는 '참말이 아니다'라고 하기보다는, '참말은 죽었다.'라고 해야될듯. ^^;
또한 헤라클레이스토스한테는 추가로 '여자친구는 영원히 변화한다.'를 추가해도 좋을듯.
왠지 모르게 무진장 설득력 있군요. 캬득캬득캬득

그리고. 그런 이데아적 여친은 오로지 이성에 의한 탐구로만 얻어질 수 있지요.(에효.)
Commented by 정준엽 at 2007/10/20 22:14
정리하고 보니 꽤나 설득력있음. 여자친구는 영원히 변화한다.
칸트횽님을 아직 공부하지는 못했는데 괜찮을지도.ㅎㅎ
니체는. 뭐... 여자친구는 죽었다? 정도...
헤라클레이토스의 여자친구 영원히 변화한다. 괜찮습니다. ㅎㅎ.

그런데 대체 여자친구를 오로지 이성에 의한 탐구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실천적으로 여자친구를 이성에 의해 탐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런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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